2026년 8월 – 운명의 갈림길
지난 2월, 독일 총리는 중국을 국빈 방문했다. 항저우에서 중국의 전기차와 로봇 공장들이 뿜어내는 가공할 생산성을 목격한 그는 정신이 번쩍 든 채 귀국길에 올랐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총리는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위기감을 마주했으며, 독일 제조업체들이 당장 혁신에 속도를 내지 않으면 중국 경쟁사들에게 완전히 도태될 것이라는 확신이 깊어졌다고 한다. 총리는 곧바로 샌프란시스코 방문 일정을 잡았다. 지난 몇 달간 신뢰하는 독일의 기업인들과 경제학자들, 그리고 미국의 거물 금융가들까지 모두 AI 혁명은 실체가 있는 거대한 문명사적 격변이라 입을 모았기에, 그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 대규모 산업 사절단을 이끌고 태평양을 건넌 것이다.
총리는 웬만한 격랑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노련한 정객이었으나, 미국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지난 중국 방문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유럽의 엘리트들이 지난 18개월을 완전히 오판했음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AI가 기술적 한계에 부딪힐 것인가’를 두고 브뤼셀에서 한가롭게 탁상공론을 벌이는 사이, 기술은 낙관론자들의 예측마저 비웃듯 무섭게 진화해 있었다. 유럽이 AI의 가치를 저울질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AI는 소프트웨어 공학과 사이버 보안의 판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정작 유럽이 자기들의 소버린 AI 이니셔티브를 자축하는 순간에도, 미국 기술 공급망에 대한 종속은 오히려 더 깊어졌을 뿐이다.
그 후 며칠간 총리는 프랑스 대통령, 그리고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연일 장시간 통화를 이어갔다. 세 정상 모두 유럽이 돌이킬 수 없는 기로에 섰다는 데 뜻을 같이한다. AI의 역량은 앞으로도 폭발적으로 진화할 것이며, 그 발전이 인간 수준에서 멈출 것이라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AI는 노동 시장과 안보 체계, 그리고 대륙 간의 지정학적 힘의 균형을 완전히 재편할 터였다. 하지만 유럽은 종속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뱃머리를 돌려야 한다면, 바로 지금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기술 자문위원들은 데이터 센터 운영사와 하드웨어 공급망 기업들에게 유럽의 모든 규제를 전면 무력화하는 초법적인 백지위임장을 쥐어 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몰아붙였다. 마주한 위기의 무게를 감안할 때, 오직 이 같은 극단적인 대책만이 합당하다는 논리였다. AI가 촉발할 새로운 산업혁명 앞에서 유럽이 당장 전시 체제에 준하는 초고속 산업화에 착수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낙오될 것이 다. 지금 유럽에 필요한 것은 평시 체제에선 상상도 못 했을 압도적인 속도전이었다.
반면 정무 참모들은 훨씬 더 절제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며 간곡히 만류했다. 이런 파격적인 법안이 불러올 대중의 거센 반발을 감당하다간, 정권 자체가 공중분해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대중은 여전히 AI에 냉담했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EU 앞에는 이미 산적한 민생 난제들이 수두룩했고, 이 조치의 필요성을 이해해 줄 유권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참모들은 관료들이 말하는 그 ‘효과적인 대책’이란, 정치 생명을 끝장내는 데나 가장 효과적일 뿐이라고 말했다.
2026년 9월 – 장밋빛 비전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프랑스·독일 AI 주권 정상회의에서, 프랑스 대통령과 독일 총리가 공동 연설에 나섰다. 정무 참모들이 작성한 연설문이었다.
릴에 있는 자택에서 이를 지켜보던 캐롤라인의 귓가로 확고한 의지와 대륙의 운명을 역설하는 두 정상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들은 유럽이 에너지와 국방 분야에서 이미 뼈저린 교훈을 얻었듯,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 기술을 더 이상 외세에 의존할 수는 없다고 명확히 선언했다. 이제 유럽은 자체적으로 첨단 AI를 구축해야 한다.
눈앞의 과제는 첩첩산중이었으나, 두 정상은 결코 넘지 못할 벽은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과감한 투자,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공정한 게임 규칙을 따르도록 강제할 규칙, 그리고 유럽산 제품을 선택해 줄 시민들의 지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연설문에는 멋진 슬로건들이 가득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AI 관련 정책 발표가 거의 매일같이 쏟아졌다. 회의론자들의 기세를 꺾고 대륙 전역에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치밀한 여론전의 일환이었다. 이에 따라 프론티어 AI 이니셔티브에 20억 유로 규모의 자본 투입이 정식으로 단행되면서 관련 사업들이 비로소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네 곳의 기가팩토리 추가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고, 새로운 AI 도입 프로그램들도 잇따라 가동되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압박도 본격화되었다. 집행위원회는 범용 AI 모델을 규정한 AI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의 한 공급업체를 전격 기소했다. 동시에 해당 업체가 AI 생성 허위 정보에 부실하게 대응한 점을 문제 삼아, 디지털 서비스법(DSA)상 가장 포괄적인 조항을 발동하며 두 건의 시스템적 위험 조사에 착수했다.
가장 대대적으로 보도된 핵심 조치이자, 캐롤라인의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온통 화제로 삼은 것은 집행위원회가 제안하고 프랑스와 독일이 전폭 지지한 ‘디지털 주권 규정(Digital Sovereignty Regulation)’이었다. 이는 2032년까지 핵심 공공 부문의 모든 시스템을 100% 유럽산 클라우드와 AI 소프트웨어로만 구동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었다. 미국의 AI도, 미국의 클라우드도 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선전포고였다. 과거 유럽의 기후 변화 목표를 모델로 삼은 이 법안은, 시장과 사회 전체에 강력한 경종을 울릴 만큼 구속력 있는 마감 시한을 제시했다. 동시에 유럽 자체 공급업체들에게는 거대하고 확실한 미래 고객층을 보장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터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환영을 받았다. 미국과의 ‘디커플링’ 정책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평론가들은 이번 움직임을 AI 시대를 위한 산업 정책이라 치켜세우며 유럽이 마침내 자국의 기술 기업들을 밀어주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평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캐롤라인의 동료들조차, 이번만큼은 마침내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부 경제학자들과 기술 정책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유럽이 더는 상충 관계에 따른 뼈아픈 대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지적했다. 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작아 시장 전체를 움직일 만한 파급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유럽 땅에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도록 유도할 시장 고유의 유인책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공공 조달 목표가 파편화된 단일 시장, 스타트업의 성장과 AI 도입을 가로막는 경직된 노동법, 그리고 의료나 법률 서비스 같은 분야를 사실상 폐쇄적으로 운영하게 만드는 국가별 규제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또한 AI 법에 따른 규제 조치는 충분히 명분이 서지만, 디지털 서비스법에 기반한 조치는 어느 정도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유럽이 어디에 전력을 집중할지 더 신중하게 선택했어야 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엘리트층은 뿌리 깊은 비관론에 이미 지쳐 있었고, 이번 대책은 대중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판을 뒤흔들 수 있는 확실하고 긍정적인 비전이었다. 정책 입안자들은 속으로는 깊은 의구심을 품었으면서도, 대부분은 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캐롤라인 역시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이번 소버린 AI 정책 전체가 6년 뒤에도 유럽에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프론티어 AI 분야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캐롤라인은 바로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정조준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실질적인 파급력을 확보하기 위해, 컨틴전시 플랜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내용이었다. 유럽 AI 산업의 선두 주자인 헬리오스가 미국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거나, 기가팩토리 건설이 차질을 빚거나, 혹은 유럽산 제품 의무화 제도로 인해 공공 부문이 미국산보다 뒤떨어진 도구를 쓰게 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우려를 조목조목 담았다. 국장은 그녀의 보고서를 주의 깊게 읽은 뒤, 매우 심도 있는 분석이라며 윗선에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크리스티안: 2032년? 100% 소버린 AI 확보라고?
크리스티안: 플랜 B는 있고?
캐롤라인: 그런 건 없어.
크리스티안: 그렇겠지, 없을 줄 알았어
비공식 석상에서,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서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며 자조 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로서도 얽히고설킨 정치적 이해관계를 단번에 헤치고 나아갈 수는 없었다. 관료 체제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는 딱 여기까지였다.
2027년 6월 – 닫히는 기회
그해 여름, 중국의 AI 연구소 지모가 미토스급 AI 모델의 가중치를 전격 공개했다. 이로써 앤트로픽이 프로젝트 글래스윙의 장막 뒤에 묶어두었던 파괴적인 사이버 공격 능력은 전 세계 누구나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로 돌변했다. 문제는 이 강력한 힘을 손에 쥐게 된 이들이 전부 선의를 품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장착한 해커들의 예리한 칼날 앞에, 보안이 취약한 기존의 상용 소프트웨어들은 마치 헤진 천조각처럼 힘없이 찢겨 나갔다. 미토스급 사이버 방어 시스템을 구입하지 못한 유럽의 대학과 병원, 지방 정부 등 수많은 기관의 시스템이 순식간에 마비됐다. 화면에는 그저 암호화폐 지갑 주소만이 덩그러니 떴고, 피해자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해커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는 것뿐이었다. 오직 사이버 방어에 AI를 도입한 기관만이 간신히 숨통을 붙들고 있었는데, 이는 AI 기업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들끓게 만들었다. 제 손으로 병을 퍼뜨려 놓고는, 이제 와서 치료제를 비싼 가격에 팔아치우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AI 주권 확립 시도의 대가를 가장 뼈아픈 방식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디지털 주권 규제가 막 통과된 참이었고, 여러 회원국은 이미 훨씬 전부터 이 기조에 맞추어 공공 조달 체계를 유럽산으로 조정해 오고 있었다. 문제는 사이버 방어 분야에서 미국의 AI 선두 주자인 아틀라스가 유럽의 자존심인 헬리오스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저만치 앞서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결국 ‘바이 유러피언(Buy European)’ 의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유럽 공급업체의 제품만을 고집했던 기관들이, 랜섬웨어 대란의 가장 취약한 표적이 되어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미국 업체와의 계약을 유지해 온 기관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류의 방어 체계를 가동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미국의 행정명령 발동 이후, 미국 정부는 새로운 프런티어 모델이 출시될 때마다 비공식적인 사전 승인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그 결과 미국의 최고급 사이버 모델이 유럽에 도달할 때쯤이면, 이미 미국 내 출시 이후 적게는 두 달에서 길게는 여섯 달이나 지난 뒤였다. 이때쯤이면 프론티어 레벨의 오픈소스 모델도 그와 비슷한 성능에 위험천만할 정도로 근접한 시점이었으며, 미국의 해커들이 이미 해당 모델을 손에 넣은 이후였다. 공식적으로 워싱턴은 이를 글로벌 안전과 감독을 위한 조치라 천명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국은 손에 쥔 이 비대칭적 우위를 내려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캐롤라인은 6월의 대부분을 각국 정부와의 전화 통화로 보냈다. 수화기 너머의 대화는 매번 용건만 간단히 오갔고, 매순간 숨 막힐 정도로 냉랭했다.
크리스티안: 브뤼셀은 이번 랜섬웨어 대란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어?
캐롤라인: 엉망진창이야. 주권 확립 정책들이 도리어 발목을 잡았어.
크리스티안: 참 지독한 역설이네.
캐롤라인: 여기선 전혀 웃을 일이 아니야.
크리스티안: 미안, 네 말이 맞아
유럽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던 바로 그 순간, 미국과 중국은 프런티어 AI 모델의 오픈소스 배포를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방침을 동시에 발표했다. 워싱턴은 적대국의 연구개발 가속화와 자율형 사이버 역량의 확산을 들어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베이징은 ‘사회 안정과 질서 유지’를 천명했다. 지정학적 라이벌인 두 정부가 이례적으로 한목소리를 낸 셈이다. 프런티어 모델의 가중치는 이제,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넘겨줄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중국의 금지 조치 발표가 전해진 그날 저녁, 사무실을 나서는 캐롤라인은 주변의 들뜬 분위기를 직감했다. 그간 유럽연합의 기술 주권 패키지 법안은 미국의 AI 독점을 견제할 대항마로 오픈소스를 치켜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동료들은 안도하고 있었다. 랜섬웨어의 창궐은 가라앉을 것이다. 공격의 기세는 꺾이고 방어 체계가 그 뒤를 따라잡을 터였다. 동료들은 이번 위기가 이것으로 진화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오픈소스 전면 금지가 앞으로 유럽의 심화되는 기술적 대외 의존성에 어떤 치명적인 파장을 몰고 올지 깊이 고민하는 이는 거의 없어 보였다.
2028년 1월 – 중간 점검
스트라스부르 회동 이후 16개월이 흐르는 동안, 캐롤라인은 승진과 함께 새로운 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빅테크 CEO들의 예언은 적중했다. AI의 발전 속도는 2026년의 예측을 비웃듯 한층 더 빨라졌다. 이제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정교한 스프레드시트를 돌리고, 소프트웨어를 설계하며, 거액의 금융 툴을 조작한다. 하나의 모델이 가상의 이미지를 생성하면, 다른 모델이 포토샵을 켜고 구도가 완벽해질 때까지 수십 번의 수정을 거듭하는 식이다. 캐롤라인은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인간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능숙하게 다루는 에이전트의 시연을 지켜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미국의 선두 AI 기업들은 AI 연구 자체를 자동화하는 단계에 확연히 접어들었다. 아틀라스는 상장 후 시가총액 4조 유로를 돌파했고, 이제 AI가 시대를 지배할 거대한 흐름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문학적인 자금력과 AI 연구개발이 만들어낸 플라이휠 효과는 선두 경쟁의 대열을 순식간에 극소수의 거물들로 압축시켰다. 4위와 5위에 머물던 미국의 하위 추격 기업들은 상위권과의 격차가 더 벌어지며 뒤처졌다. 한 곳은 자사의 프런티어 연구를 선두 AI 기업과의 파트너십 형태로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고, 다른 한 곳은 별도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축하며 AI 칩 자체 제조에 매달리는 실정이었다.
유럽의 기술 주권 바람을 탄 헬리오스는 미국의 프런티어 기술을 약 1년 반 뒤처진 상태로 끈질기게 추격하며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유럽 투자자들로부터 수십억 유로를 조달했고, 핵심 인재의 이탈도 방어해 냈다.
상대적 격차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브뤼셀에선 일종의 위대한 승리처럼 칭송받았다. 하지만 절대적 격차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2023년의 18개월은 단 한 세대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기술 발전이 폭발적으로 가속화되고 고도화 주기가 단축된 지금의 18개월은 수 세대의 기술적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AI 시스템은 단순한 챗봇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신약 개발을 주도하고, 수학적 난제와 사이버 보안을 완벽히 자동화하며,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자리를 무섭게 대체해 나가고 있었다.
프랑스 소매금융 은행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캐롤라인의 오랜 친구는 와인 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회사가 도입했다는 주권 AI 정책의 초라한 민낯을 씁쓸하게 털어놓았다. 직원들은 아틀라스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데이터셋의 열 이름조차 설정하지 못할 정도로 보안 규제가 엄격해 실질적인 데이터는 단 하나도 활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럽산 헬리오스를 쓰자니 성능이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그는 개인 노트북으로 아틀라스를 구동해 작업을 끝낸 뒤, 그 결과물만 회사 컴퓨터로 복사해 오는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눈속임은 대부분의 유럽 대기업 내부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뤼셀의 정치가들은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프런티어 AI 이니셔티브는 전속력으로 가동 중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이 비영리 연구소에 전폭적인 정치적 지지를 보냈고, 미국에 뒤지지 않는 보상을 제시해 미국 AI 기업 출신의 실력 있는 인재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로봇 훈련에 활용되는 ‘월드 모델’ 연구는 과감한 베팅 끝에 전 세계의 이목을 끌 만큼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다.
2028년 EU 예산은 의학, 신소재, 친환경 에너지 등 유럽이 여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과학 분야의 AI 연구에 상당한 규모의 신규 자금을 수혈했다. 초기의 삐걱거림을 뒤로하고 도입된 시범 사업들은 점차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의사들의 진료 효율성이 향상되었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보고했다.
우려했던 고용 대참사 역시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AI 도입률이 높은 업종에서조차 눈에 띄는 고용 감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컨설턴트, 변호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애널리스트, 디자이너 중 AI 시스템을 능숙하게 조율할 줄 아는 노동자들의 성과와 임금은 동반 상승했다. AI가 단순 반복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면서, 인간 고유의 판단력과 고객 관계 유지, 그리고 책임이 더욱 중요해진 덕분이다.
유럽의 한 총리는 인터뷰에서 유럽의 출발이 늦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이제 완전히 궤도에 올랐으며 유럽형 AI가 새로운 생산성 붐을 견인하고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캐롤라인은 인터뷰 기사를 크리스티안에게 공유했다.
캐롤라인: 내 상사가 아주 무능한 정치꾼은 아니었나 봐.
크리스티안: 그 달콤한 생산성 붐, 지금 마음껏 즐겨둬
크리스티안: 결국 다 지나가는 후행지표니까
2028년 5월 – 컴퓨팅 대란
전 세계가 단 1메가와트의 컴퓨팅 자원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지금껏 AI 칩 공급망을 가로막았던 모든 병목 현상에는 어떻게든 우회로가 존재했다. 파운드리 용량이 부족해지자 TSMC와 삼성전자가 공장을 증설했다. 미국의 전력망이 밀려드는 데이터센터를 감당하지 못하자, AI 기업들은 이동식 가스 엔진을 통째로 사들여 현장에서 직접 전력을 조달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급이 부족해지자 스마트폰 등 소비자 제품에 들어갈 물량을 강제로 돌려버렸다. 그 여파로 스마트폰 가격이 폭등했지만, 그들이 신경 쓸 바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마주한 병목은 차원이 달랐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대기업 ASML은 TSMC가 AI 칩을 찍어낼 때 쓰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지구상 유일한 기업이다. 연간 생산량을 60대에서 85대로 늘리며 분명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폭발하는 AI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ASML과 연계된 부품 협력사만 5,000개가 넘었다. 그중 단 한 곳이라도 나사 하나가 틀어지면 공급망 전체가 지연된다. 장비에 들어가는 10만 개의 부품 중 단 하나를 개선하는 데만도 박사 학위와 수년간의 전문 경험이 필요할 정도로 공학적으로 복잡했다. 그런 인재를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워싱턴은 ASML이 업계에서 ‘심자외선 이머전(DUVi)’라 불리는 구형 노광장비의 일부를 여전히 중국의 특정 기업들에 수출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국은 이 장비로 미국의 첨단 칩보다 성능이 다소 떨어지는 자체 AI 칩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픈소스를 두고 잠시 뜻을 모으는 듯했던 미·중 관계는 지난 1년간 다시 악화되었다. 워싱턴은 중국이 자체 반도체 생태계를 완전히 완성하는 순간, 대륙의 물량 공세로 미국을 압도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미국의 전력 생산량이 정체된 사이, 중국은 가공할 속도로 엄청난 양의 전력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AI가 누가 더 많은 데이터센터를 짓느냐의 싸움이 된다면, 장기적으로 승자는 중국이 뻔했다. 반면 베이징은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가 완전히 자립하기도 전에 미국이 군사적 AI 분야에서 돌이킬 수 없는 우위를 점할까 봐 두려워했다. 미국이 그 AI 우위를 무기 삼아 지정학적 양보를 강요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AI 기업 CEO들이 언론에 대놓고 군사적 AI를 활용해 독재 정권을 ‘민주화’하겠다고 떠드는 소리는, 베이징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워싱턴은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미국이 쥐고 있는 AI 주도권은 수년 전 네덜란드산 EUV 장비와 미국산 AI 칩에 걸어 잠근 영리한 수출 통제 덕분이었다. 미국은 판을 더 키우기로 했다. 헤이그를 압박해 ASML의 남은 DUVi 장비 수출과 유지 보수 서비스까지 전면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대규모 확전이었다. 중국은 이 장비로 스마트폰과 노트북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물건들에 들어갈 칩까지 찍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반발하며 다른 EU 회원국들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워싱턴의 명분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지난 2년간 유럽을 괴롭혀온 미 행정부 때문에 강대국 간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가 되는 것은 더더욱 질색이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몇몇 회원국은 장비 수출을 강행했다가 미 대륙으로부터 날아올 보복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결국 유럽의 연대는 채 모양을 갖추기도 전에 각자도생으로 찢어졌다.
배신감을 느낀 네덜란드는 하드웨어 공급망에서 자신들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똑같이 미국의 압박을 받고 있던 한국과 일본에 손을 뻗었다. 공동 전선을 펴보자는 절박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서울과 도쿄 모두 미국의 군사적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지난 2주 사이에 미국의 고위 관료들이 두 수도를 잇달아 방문해 이미 손을 써둔 뒤였다. 네덜란드에 돌아온 것은 돌아온 것은 정중한 침묵뿐이었다.
네덜란드가 계속 버티자 워싱턴은 협박 카드를 꺼냈다.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의 발동이었다. 미국산 기술이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만든 제품이라면, 전 세계 어디서 누가 만들었든 자국법의 관할권 아래 두는 규정었다. 2020년 미국이 화웨이의 숨통을 죌 때 썼던 바로 그 무기였다. ASML의 장비는 이 규정에 누차 해당됐다. 중국에 DUVi 장비를 단 한 대라도 더 팔았다간 ASML은 미국법을 위반하게 된다. 수출 권한 박탈과 과징금은 물론, 이론적으로는 경영진 개인에게 형사 책임까지 물을 수 있는 치명적인 올가미였다. 물론 이 조치는 ASML의 장비에 의존하는 미국 자신에게도 부메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ASML로서는 저들의 경고가 허풍인지 시험해 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네덜란드는 무릎을 꿇었다.
브뤼셀의 회의실을 오가는 사이, 캐롤라인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머릿속에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던 자신의 2026년 보고서가 스쳐 지나갔다. ‘사려 깊은 제안’이라던 국장의 친절한 얼굴도 떠올랐다.
크리스티안: 이번 건 경고사격이야
크리스티안: 그쪽 수뇌부도 그 정도 현실 감각은 있겠지?
캐롤라인: 우리 팀은 그렇게 보고 있어.
캐롤라인: 다른 부서 사람들은 그저 일시적인 차질 정도로 치부하고 있지만.
크리스티안: 그래
크리스티안: 뻔하지
캐롤라인: 미국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해.
캐롤라인: 근데 우린 이렇게 되는 동안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어.
크리스티안: 완전히 망했네
2028년 8월 – 파멸의 전조
이제 AI 모델은 더 이상 영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2025년 초 도입되어 인간이 직관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었던 ‘디지털 스크래치패드(Digital Scratchpad)’ 방식 대신, 새로운 시스템은 인간은 물론, 다른 최신 AI 모델조차 해석할 수 없는 긴 수열인 ‘고차원 벡터’로 사고한다. 복잡한 추론 과정을 굳이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없어지자, 시스템의 사고 속도와 깊이는 차원이 달라졌다. 지능과 역량의 대폭발이 시작된 것이다.
전대미문의 진화를 추적해 온 AI 안전 연구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AI를 통제하기 위해 구축한 전략의 상당수가 스크래치패드의 존재를 전제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모델이 수면 아래에서 독자적인 목표를 추구하더라도 이제 무슨 수로 알아낸단 말인가. 추론 과정을 읽을 수 없다면, 오용 감시 시스템이 위험천만한 징후를 포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브뤼셀의 규제 전문가들은 유럽연합 AI 사무국이 개발사들에게 스크래치패드 시스템으로 복귀하도록 강제하거나, 시스템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입증할 다른 증거를 제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AI 사무국은 이미 미국 개발사 두 곳과 격렬한 법적 공방을 벌이며 진흙탕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미·유럽 관계는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평범한 대중이 피부로 느낀 가장 즉각적인 변화는 비약적인 성능 향상이었다. 예전 같으면 수일이 걸리던 복잡한 리서치 프로젝트를 모델이 막힘없이 해내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생산성을 확인한 미국 기업들은 마침내 해고의 칼날을 빼 들었다. 신입사원 채용 시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실업률 곡선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유럽은 강력한 노동법 덕분에 당장의 고용 충격은 비껴갔지만, 대신 경제 성장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가고 있었다. 미국이 연 3.8%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을 기록하며 독주하는 사이, 유럽의 성장은 1.6% 턱밑에서 마비되었다. 두 대륙 간의 격차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졌으며, 이는 AI가 창출한 가치를 어느 쪽이 흡수했는가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유럽 역시 미국과 대체로 비슷한 프론티어 모델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경제적 실익을 수확하는 역량은 현저히 떨어졌다. 여기에는 명확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본의 귀속이었다. 매출이 천문학적으로 치솟는 AI 기업과 인프라 공급업체들은 전부 미국의 차지였다. 유럽 토박이 AI 스타트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케일업을 주도하는 것은 결국 미국계 벤처캐피털이었다. 빠르게 성장한 유망주들은 결국 대서양을 건너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둘째는 도입 속도의 격차였다. 유럽이 시범 사업을 만지작거리며 간을 보는 동안, 미국 기업들은 프론티어 AI를 실무 전반에 공격적으로 도입했다. 유럽 기업들은 파편화된 규제에 발이 묶였거나, 위험을 기피하는 보수적인 경영 문화, 혹은 성능이 떨어지는 자국산 솔루션을 고집하는 사내 지침 때문에 뒤처졌다. 한때 이탈리아 상법에 대한 독점적 지식을 무기로 고액의 수임료를 받던 밀라노의 한 로펌은 이제 미국 로펌과 생존을 겨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상대 미국 로펌의 AI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관할 법률을 동시에, 그것도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처리해 냈다. 반면 밀라노의 변호사들은 최첨단 AI 모델의 접속조차 차단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장 잠식의 패턴은 컨설팅, 소프트웨어, 금융산업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세 번째는 기업 내부의 혁신 격차였다. 미국의 중견기업들은 단 몇 달 만에 조직도를 평평하게 펴고, 팀 규모를 줄이며, 비즈니스 사이클을 앞당기는 등 AI를 중심으로 조직을 완전히 재편했다. 반면 유럽 기업들은 이 과정에 수년이 걸렸다. 유럽의 직장협의회는 AI 도입을 늦췄고, 경직된 고용 보호 제도는 자동화로 대체 가능한 인력의 감원을 가로막아 정작 인력이 부족한 부문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일부 노동자들은 AI의 도움으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반면, 적지 않은 수의 유럽 노동자들이 이른바 ‘시늉뿐인 노동’에 안주했다. 시스템에 로그인하고 회의에는 참석하지만, 실제 업무는 AI 에이전트에게 맡겨 순식간에 끝내버리는 방식이었다. 좋은 점도 있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었고, 여유로운 점심 식사와 오후의 산책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기업들은 AI 인프라 비용은 비용대로 지불하면서 생산성 없는 인간 노동자의 임금까지 이중으로 부담하고 있었다. 성장에 투자되어야 할 자본이 기존 고용인원 유지하는 데 고스란히 묶였다.
유럽 경제의 기초체력이 이미 바닥을 드러낸 시점이라 충격은 더 컸다. 유럽의 핵심 제조업은 갈수록 해외로 탈출했는데 한때 유럽의 자존심이었던 자동차 제조사들이 가장 먼저 치명타를 입었다. 전기차 전환의 골든타임을 놓친 결과, 더 저렴하고 성능까지 뛰어난 중국산 자동차의 공세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것이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럽 노동자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미궁 속으로 내던져졌다.
설상가상으로 유럽 정부들의 세수 기반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과거 노동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어야 할 자금이 이제는 미국 기업과 그 투자자들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그 상당수는 유럽 세무당국의 손이 닿지 않는 조세회피처를 경유했다. 동시에 대륙 전역에서 실업급여 청구 건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당장 폭발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한발 앞서가는 미국의 지표들은 유럽의 미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잔인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여기에 AI 붐이 글로벌 금리까지 밀어 올리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국들은 매년 국가 부채의 이자를 감당하는 데만 전체 예산의 상당 부분을 쏟아부어야 하는 재정적 한계 상황으로 내몰렸다.
캐롤라인: 이제야 네가 했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가 가.
캐롤라인: 유럽이 이 파멸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유일한 해결책은 결국 경제 성장뿐이었어.
캐롤라인: 하지만 그 성장의 과실은 전부 미국에서만 열리고 있네.
크리스티안: 그렇지
캐롤라인: 방금 길에서 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났거든?
캐롤라인: 자기는 하루에 딱 세시간만 일한대.
캐롤라인: 나머지는 자기 AI 에이전트들한테 다 돌려놓는 거지.
캐롤라인: 보아하니 요즘은 정원 가꾸기에 푹 빠진 모양이더라고.
크리스티안: 친구한테는 잘된 일이네, 뭐.
2028년 11월 – 민심
미국 대통령 선거의 막이 올랐다. 세계는 늘 그렇듯 숨을 죽인 채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대선의 성격을 규정한 결정적 화두는 단연 AI였지만, 그 전개는 업계의 염원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미국인 대다수는 이미 AI에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환경 단체들은 데이터 센터가 삼켜버리는 가공할 전력 소비량을 경고했고, 노동조합은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교사들은 교실에서, 변호사들은 법정에서 AI를 축출하라고 소리 높였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좌우를 막론한 포퓰리스트들은 강력한 ‘반 AI’ 공약을 들고나왔다. 이들은 데이터 센터 건설 일시 중단, 노동자 보호 대책, 교육계 내 AI 퇴출, 이용 연령 제한 조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본선에 접어들며 기술 업계와의 긴밀한 유착과 거대 자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도파 후보들이 살아남았지만,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민심은 끓어오르고 있었다.
반 AI 정서는 이념적 스펙트럼을 넘어 전방위로 확산되었으나, 그렇다고 분열된 사회가 하나로 묶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통적 대립선을 넘어 새로운 균열이 터져 나왔다. AI를 사용하는 엘리트 계층과, 그것을 공포이자 비인간적이며 부도덕한 괴물로 받아들이며 불평등의 심화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중산층 사이의 깊은 도랑이었다. 대중은 점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러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암살 위협에 노출되었고, 얼마 전에는 한 데이터 센터가 방화로 잿더미가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AI를 규제할 수 없었다. 전임 정권이 그랬듯, 신임 대통령 역시 미국이 중국과의 AI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이 닥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대중이 원하는 근본적인 해결책 대신, 성난 민심을 미봉책으로 달래는 데 급급했다.
반 AI 정서의 불길은 대서양을 넘어 유럽으로도 무섭게 옮겨붙었다. 미국 빅테크 기업을 향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정부가 직접 행동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대중은 더욱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요구했으나, 정작 유럽이 기존 복지 체제조차 감당할 재정적 여력이 바닥나 있다는 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유럽의 AI 기업들은 더욱 깊은 도태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부의 대규모 공공 투자와 컴퓨팅 보조금, 우선 구매 계약 등 온갖 특혜성 지원도 무색하게 헬리오스와 아틀라스의 격차는 한층 더 벌어졌다. 수많은 내부 AI 에이전트들이 스스로 코드를 짜며 구동되는 미국의 AI 기업들은, 인간 연구원들에게만 의존하는 유럽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알고리즘 혁신을 이뤄내고 있었다. 가파른 진화를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은 컴퓨팅 자원의 한계뿐이었지만 아틀라스는 이미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손에 쥐고 있었다. 반면 컴퓨팅 처리 능력도 턱없이 부족한 데다, 세계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미국산 모델조차 보안 규제 탓에 내부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헬리오스의 연구 효율은, 사실상 측정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초라한 수준이었다. 매달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공공 차원의 노력이 몇몇 공공재를 생산하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유럽의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데는 실질적인 보탬이 되지 못했다. 프론티어 AI 이니셔티브가 AI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해석 가능성 연구에서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며 글로벌 AI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던 월드 모델 프로그램은 미국에 통째로 탈취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연구 성과가 가시화되자마자 이를 눈여겨본 아틀라스가 순식간에 자체 팀을 꾸리더니, 천문학적인 컴퓨팅 예산을 무기로 이니셔티브의 핵심 연구원 네 명을 빼내 간 것이다. 짐을 싸서 떠나는 연구원들은 동료들에게 정말 유럽에 남고 싶었다고, 유럽의 원대한 프로젝트를 믿었고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싶었다며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서 신념만으로 버티는 데는 결국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대중 역시 유럽연합의 거창한 AI 대전략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었음에도 헬리오스 같은 유럽의 간판 기업들은 추격의 발판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디지털서비스법을 앞세운 규제의 칼날은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미국을 자극해 미·EU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부작용만 낳았을 뿐이다.
그러나 유럽은 그동안 프로젝트에 막대한 정치적 자산과 실제 자본을 쏟아부은 상태였다. 이제 와서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지난 2년의 세월과 수백억 유로의 자금을 아무런 출구도 없는 막다른 길에 탕진했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유럽은 과오를 돌이키는 대신, 기존 노선을 강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광반도체와 엣지 AI 등 ‘차세대’ 패러다임에 집중하는 200억 유로 규모의 새로운 ‘유럽 AI 주권 기금’의 출범을 알렸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누가 보아도 희박했다. 자본을 첨단 기술 역량으로 전환하는 데 이미 실패했던 바로 그 기관들이, 더 촉박한 시간 속에서 한층 더 까다로운 목표를 쥐고 다시 시험대에 오른 격이었다. 연회장에서 만난 한 폴란드 출신 유럽의회 의원은 캐롤라인에게 손에 쥔 패가 단 한 장도 없으면서 판돈만 올려 부르는 건 처음 본다고 말했다.
대륙 전역에서 균열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기계를 멈추고 독일인의 일자리를 지키자”라는 노골적인 반 AI 슬로건을 내건 포퓰리스트 정당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 1위로 올라섰다. 지난 5년간 EU에 회의적인 정부가 집권했던 이탈리아에서도,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EU 탈퇴 국민투표를 공공연히 선거 공약으로 내걸고 매섭게 몰아치는 중이었다.
파리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다. 엘리제궁은 유럽연합의 계획으로는 당장 요구되는 타임라인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 결론 내렸다. 대규모 언어 모델 분야에서 유럽에 남은 유일한 불씨인 헬리오스가 영원히 도태되기까지는 불과 몇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긴박한 협상 끝에 프랑스는 헬리오스에 150억 유로에 달하는 단독 국가 투자를 단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대가로 17%의 지분과 이사회 의석, 그리고 향후 모든 투자 유치 라운드에 대한 거부권을 거머쥐었다.
크리스티안: 프랑스가 방금 시체 한 구를 통째로 인수했네
캐롤라인: 말이 너무 심하잖아.
캐롤라인: 어떻게든 파국을 막아보려고 실제로 발버둥 치고 있는 거라고.
크리스티안: 그렇다고 본질이 변하지는 않아
2029년 1월 – 로봇 경제의 꿈
중국의 AI 전략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을 제외하면 유럽연합과 판박이였다. 중국의 전략은 실제로 통하고 있었다. 브뤼셀이 그랬듯 베이징 역시 유망한 간판 기업들을 전폭적으로 밀어주었고, 보조금과 우선 구매 제도로 자국 산업의 울타리를 쳤으며, 광적인 속도로 기술 도입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밤낮없이 삐걱거리는 27개 회원국을 달래야 하는 유럽과 달리, 중앙집권화된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훨씬 수월했다. 컴퓨팅 자원이 여러 AI 기업으로 파편화되자 중국 공산당은 그저 자원을 한데 모으라는 명령 한마디를 내렸을 뿐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는 그런 권력이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인재풀이 훨씬 더 두터울 뿐만 아니라 저렴하고 풍부한 에너지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덕분에 중국의 프론티어 연구소들은 미국의 독주를 불과 1년 미만의 격차로 바짝 추격하는 중이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이 최첨단 인지형 AI의 개척자가 되는 데 목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베이징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다. AI로 실물 경제를 먼저 일으키는 것. 그리고 중국에는 이미 로봇 제조라는 압도적인 무기가 있었다. 막대한 국가 보조금이 투입되면서 휴머노이드 로봇의 연간 생산량은 진작에 100만 대를 돌파했고, 가정용 로봇 한 대 값은 단돈 1만 유로 수준까지 폭락했다. 이제 선전 같은 첨단 대도시의 거리에서 휴머노이드가 묵묵히 쓸고 닦으며, 사족보행 로봇이 일사불란하게 택배를 나르는 풍경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 되었다. 베이징은 당분간 실리콘밸리의 뒤꽁무니를 바짝 쫓아가기만 해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AI의 로봇 관련 역량이 독자적인 궤도에 오르는 순간 자국의 막강한 제조업 경쟁력과 결합해 효과를 내리라는 계산이었다.
베이징의 도박은 적중하는 듯 보였고, 미국 내의 위기감은 날로 고조되었다. 워싱턴의 정객들은 중국과의 AI 경쟁을 ‘제2차 냉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미국이 네덜란드 ASML을 압박해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을 전면 차단하면서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과열되었고, 양국은 약속이라도 한 듯 AI 개발 기지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이제 미국에서 연구원들은 정보기관의 엄격한 신원 조회를 거쳐야 했고, 최첨단 모델의 가중치에 접근하려면 안보 승인을 받아야 했다. 미 연방 정부 역시 중국이 알고리즘 기밀을 훔쳐 가고 있다며 정기적으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맞서 중국은 자국 핵심 AI 기업인 지모를 사실상 국유화하며 막대한 국가 역량을 AI 전선에 일제히 집중시켰다. 지모의 대규모 데이터 센터 인근에서 중국 전력망의 일부가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미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AI 기반 사이버 공격이 아니냐는 소문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크리스티안: 나 지금 선전이야.
크리스티안: 세일러 모자를 쓴 로봇이 방금 나한테 네그로니를 한 잔 만들어줬어
크리스티안: 여기선 로봇을 무슨 종이클립 찍어내듯 만들고 있네
캐롤라인: 네그로니 맛은 괜찮고?
크리스티안: 어. 훌륭해
2029년 4월 – 전 영역 접근 권한
AI 수요는 하늘을 찌를 듯 폭증하는데 컴퓨팅 공급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미국의 프론티어 AI 기업이 최첨단 모델의 접근 권한을 제한하고 가격을 올리기 시작하자, 시장 전역에서 토큰을 달라는 기업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 세계 AI 컴퓨팅 자원의 무려 70%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철저한 지배 구조 아래서 움직였고, 이들의 독점적 서비스는 지구 전역을 완벽히 장악했다. 미국의 인프라가 해외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해외 군사력을 키우며, 해외 AI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고스란히 쓰이고 있는 셈이었다. 비록 마지막 경우는 정상적인 거래가 아니라 불법 증류(distillation) 공격을 통한 기술 탈취였지만 말이다. 워싱턴의 우려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미국의 국가 안보 심사는 이제 공식적인 제도로 완전히 안착하며 더는 자발적인 참여라는 시늉조차 내지 않았다. 최첨단 모델에 대한 접근은 원천 차단이 기본값이었는데, 여기에는 미국 내 자국 고객들을 위해 컴퓨팅 자원을 미리 선점해 두려는 속내가 깔려 있었다. 자원은 미국 연방 정부 기관에 가장 먼저 배정되었고, 그다음은 동맹국 정부였으며, 적대국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델과 가중치에 접근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컴퓨팅 부족 사태가 심화되면서 실제 모델을 구동하는 추론 자원마저 품귀 현상을 빚었다. 결국 4월이 되자 워싱턴이 직접 칼을 빼 들었다. 미국은 단순히 기술 접근을 제한하는 수준을 넘어, 자국의 울타리 안에 있는 동맹국들에게조차 사용량을 배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프론티어 추론 서비스 규제(FISR)’는 철저한 국가별 라이선스 등급제였다. 영어권 정보 동맹체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비롯해 한국, 일본, 대만, 네덜란드 같은 핵심 우방국들은 1등급으로 분류되어 상업적 접근을 제한 없이 허용받았고, 보고 의무도 최소한으로 적용되었다. 반면 이란, 러시아, 중국 같은 적대국들은 3등급으로 지정되어 모든 접근이 원천 차단되었다. 유럽 대부분은 그 사이에 낀 100여 개의 2등급 국가에 속했다. FISR의 골자는 명확했다. 어떤 AI 기업이든 총 프론티어 추론 자원의 25% 이상을 2등급 국가들에 통째로 넘겨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개별 라이선스는 ‘미국 국가 안보 이익과의 부합 여부’를 포함한 여러 요소를 기준으로 재심사한다는 것이었다.
브뤼셀 입장에서 관건은 바로 이 25%라는 수치였고, 이는 이는 곧 유럽 경제의 사망선고를 의미했다. 이미 유럽 고객들이 소비하는 양만 해도 미국 프론티어 추론 자원의 거의 4분의 1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이 한정된 자원을 나머지 80여 개국과 쪼개 쓰라는 것은 유럽에 할당된 몫을 반토막 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장기 계약을 확보하지 못한 유럽 기업 고객들에게 공급량 축소와 일방적인 가격 인상을 통보하는 공문이 사방에서 폭탄처럼 날아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AI 기업으로 갈아탈 수도 없었다. 미국의 모든 AI 기업이 워싱턴이 채운 동일한 규제 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미국의 AI에 목을 매는 처지였지만, 미국은 유럽에 아쉬울 게 전혀 없었다. 컴퓨팅 자원이 워낙 귀해진 탓에 유럽 고객을 통째로 잃는다 해도 빅테크 기업들의 매출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럽에 팔지 못하게 된 추론 자원은 미국 내의 잠재적 수요로 돌리거나 자사의 내부 연구개발에 투입하면 그만이었다. 아틀라스와 경쟁사들은 백악관의 눈치를 보며 기조를 완화해 달라고 막후에서 타진하긴 했다. 이런 규제가 미래의 글로벌 시장을 가로막는 데다, 대외 이미지에도 치명적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우려를 감히 공개적으로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 AI 안보 규제가 서슬 퍼렇게 강화될수록, 연방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업의 생사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온 신경은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을 단숨에 집어삼킬 만큼 빠른 속도로 인간의 지능을 추월해 가는 AI 시스템의 통제권을 쥐는 것에 쏠려 있었다. 워싱턴이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브뤼셀에서는 긴급 유럽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장관들이 1 등급 지위를 촉구하고자 워싱턴으로 날아갔으나,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2등급이 ‘현재의 양국 관계’를 가장 정확히 대변한다는 백악관의 냉담한 통보뿐이었다.
캐롤라인은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회담 요약문을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이런 파국이 오리라는 것은 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캐롤라인: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나 봐. 너무 늦었지만.
크리스티안: 결국 올 게 왔네
크리스티안: 나 역시 우려했던 시나리오고
크리스티안: 쟤들이 아예 모든 접근을 끊어버리겠다고 협박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캐롤라인: 나도 딱 그 생각 하고 있었어.
2029년 5월 – 균형의 붕괴
추론 자원 할당 제한 조치가 내려지고 일주일이 지나자, 유럽 각국 수도의 수화기는 예정된 파국을 어떻게든 늦춰보려는 기업들의 다급한 전화로 불이 났다. 프랑스의 한 공공 유틸리티 기업 CEO는 엘리제궁에 전화를 걸어, 자사의 사이버 보안팀이 이미 AI를 앞세운 공격에 밀려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미국산 프론티어 모델에 대한 접근 권한이 반토막 난 상황에서, 국가 핵심 기간 인프라가 통째로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경고였다.
덴마크 물류 대기업의 수장은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수년간 진행해 온 디지털 최적화 작업 때문에 이제는 쉽게 대체할 수도 없는 미국 시스템에 회사의 생사줄이 묶여 버렸다며 비즈니스 모델 전체가 붕괴할 위기라고 토로했다. 독일의 중소기업 대표단 역시 연방 총리실을 급히 찾아가, 지금 같은 가격 폭등세가 지속된다면 수천 개의 중소기업은 프론티어 AI를 도입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라며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 당국이 추진하던 관료주의적 AI 주권 정책을 관망하거나 비껴갈 만큼 기민했던 기업들은, 지난 수년간 미국의 프론티어 에이전트를 중심으로 자사의 비즈니스를 견고하게 구축해 왔다. 하지만 핵심 기반이던 에이전트가 한순간에 발밑에서 통째로 잘려 나갈 위기에 처했다. 유럽산 대안은 기술적으로 거의 2년이나 뒤처져 있었고, 중국산 카드는 컴플라이언스 부서가 존재하는 기업이라면 애초에 선택지에 넣을 수조차 없는 금기였다.
브뤼셀에서 AI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며 냉소하던 이들은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캐롤라인의 귀에 ‘거품’이라는 단어가 흘러들지 않은 지도 이미 수개월째였다. 예전에는 캐롤라인이 유난을 떤다며 콧방귀를 뀌던 국장조차 이제는 온종일 각국 정부와 통화하며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피해를 수습하느라 넋이 나간 상태였다. 어느 화요일 오후, 국장이 커피 두 잔을 들고 그녀의 책상 앞에 슬그머니 멈춰 서더니 한 잔을 툭 건넸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삼켰다. 캐롤라인은 직감했다. 그것이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과라는 것을.
이제 모두가 파국의 본질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지만, 문제를 아는 것과 이미 침몰하는 배를 구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헬리오스 모델을 향한 시장의 수요는 이미 회사의 감당 능력을 넘어 폭발해 버렸다. 기가팩토리들이 마침내 착공에 들어갔으나 가동은 아무리 빨라도 내년이었고, 막상 문을 연다 해도 눈앞의 거대한 공백을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크리스티안: 거참 얄궂은 게 뭔지 알아?
크리스티안: 프랑스가 헬리오스 투자로 아주 노다지를 캐게 생겼다는 거야
크리스티안: 새로운 수요가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거든
캐롤라인: 결과적으로만 보면 참 고단수의 입체적인 수싸움이 됐네.
유럽 경제는 서서히 숨통이 조여오고 있었다. 워싱턴과 수차례 날 선 통화를 주고받은 끝에, 유럽 지도자들은 마침내 특단의 조치를 꺼내 들 때가 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사상 최초로 반강제조치법(ACI)에 따른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브뤼셀 언론이 수년 전부터 ‘무역 바주카포’라 부르던 전설적인 무기였다. 실전에서 실제로 발사할 일은 영원히 없을 거라며, 다들 그저 상징적인 억제책으로만 여기던 풍요로운 시절의 유산이었다.
4개월간의 치열한 손익 계산 끝에 내려진 결론은 명확했다. 미국의 FISR 조치는 명백한 경제적 보복 행위라는 것. 하지만 그와 동시에 참담한 진실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유럽이 쥔 가장 직관적인 보복 카드가, 사실은 제 발등을 찍는 자멸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미국 클라우드와 디지털 서비스에 보복 관세를 매겨봤자, 유럽 기업들이 기를 쓰고 확보하려는 첨단 추론 자원의 가격 상승만 도리어 부추기는 꼴이었다. 10년 전이었다면 미국에 타격을 주었을 ‘공공 조달 시장에서의 미국 기업 퇴출’이라는 위협도 이젠 시효가 지난 낡은 카드에 불과했다. 어차피 디지털 주권 규정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유럽 공공 시장에서 철수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안된 보복 조치는 반강제조치법이 숨겨둔, 그리 직관적이지 않은 마지막 카드로 향했다. 유럽 단일 시장 내에서 미국 연구소들이 보유한 지식재산권 보호를 일시 정지시키고 미국 기업의 유럽 기업 인수를 허가제로 바꾸거나 전면 차단하는 방식이었다. 유럽 자체의 컴퓨팅 예산에는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워싱턴의 기술 수출 기업들에는 타격을 줄 수 있도록 정밀하게 계산된 조치들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카드는 노광장비 공급망을 겨냥한 대책이었다. ASML이 애리조나에 있는 미국 반도체 공장으로 장비를 수출하거나 사후 유지 보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제한하는 안이었다. 하지만 이는 유럽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보복을 자초할 수도 있는 이른바 ‘핵폭탄급’ 조치였다.
표결에 부쳐졌을 때, 이 안은 가결에 필요한 가중다수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부결되었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이유로 반대했다. 러시아를 경계하던 폴란드와 발트 3국 역시 같은 궤를 취했다. 이탈리아는 기권했다. 공식 석상에서 집행위원회 고위 관료는 기자들에게 이번 결과가 ‘전략적 환경에 대한 각국의 평가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프랑스 관료가 오프더레코드로 한 말은 전혀 달랐다. 원들이 지난 10년간 갈고닦아 온 무기를 막상 워싱턴이 두려워 감히 꺼내 들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여름의 대부분을 위기대응 회의로 보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든 게 다 잘될 거라 장담하던 이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매달려 아직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남았느냐고 묻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그들에게 담담히 고했다.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2025년에서 2027년 사이 그 어디쯤에선가 닫혀버렸다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2030년 2월 – 고용 쇼크
유럽이 누리던 ‘가짜 노동’의 허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동안 사람들은 한가롭게 정원을 가꾸러 가고, 기업은 경직된 노동법에 가로막혀 직원을 해고하지 못하던 비현실적인 평화는 마침내 끝이 났다.
인력 전체에 온전한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족쇄를 찬 유럽 기업들로서는, 이미 군살을 뺀 미국의 경쟁사들을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성능이 떨어지는 모델을 쓰면서도 더 비싸고 공급마저 부족한 추론 비용을 감당해야 했으니, 애초에 체급이 맞지 않는 싸움이었다. 충격은 AI의 직접적인 사정권에 든 산업군부터 차례로 강타했다.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미국 경쟁사들이 압도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훨씬 빠르게 제품을 출시하자 설 자리를 잃고 무너졌다. 중견 컨설팅 펌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려던 고액의 자문이 이미 미국의 프런티어 모델에 의해 실시간으로 예측되는 모습을 보며, 시장에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증발했음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설상가상으로 AI 시스템의 진화 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지속 학습은 화이트칼라 업무의 완전한 자동화를 가로막는 인간 고유의 마지막 방어선으로 여겨졌다. 인간 노동자는 경력을 쌓으며 맥락을 파악하는 눈, 직관적인 판단력, 그리고 문서로 규정되지 않는 암묵지를 축적한다. 반면 AI 시스템은 대화가 새로 시작될 때마다 늘 그대로 멈춰있는 가중치에서 출발할 뿐이었다. 긴 콘텍스트 창과 외부 메모리로 그 격차를 일부 좁히긴 했으나, 모델이 한 번 배포된 이후 실제로 새로운 무언가를 ‘학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틀라스의 최신 모델을 한 컨설팅 펌에 도입하고 6주가 지나자, AI는 정확히 그 회사의 고유한 문체와 스타일에 맞춰 보고서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조직 내에서 누가 누구에게 결재를 올리는지, 어떤 고객이 나쁜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어느 임원의 권력에 편승해야 하는지까지 완벽히 파악해 냈다. 구현 수준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이따금 발생하는 오류는 그 압도적인 가성비에 비하면 기꺼이 감수할 만한 비용이었다. 맥락에 따른 판단력이나 문서화되지 않은 조직의 암묵적 지식 덕분에 안전할 줄 알았던 화이트칼라의 일자리마저 마침내 무방비로 뚫려버렸다.
AI가 당장 대규모 구조조정의 피바람을 몰고 온 것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위기 상황에 직면한 기업들이 신규 채용 자체를 완전히 중단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청년 취업 시장은 역사상 최악의 빙하기를 맞이했다. 로펌, 금융사, 회계법인 등 프런티어 모델의 높은 이용료를 감당할 여력이 있거나, 선견지명으로 장기 계약을 맺어둔 기업들마저 일제히 신입 채용을 동결하거나 대폭 축소했다.
지난여름 물류관리 석사 학위를 마친 캐롤라인의 남동생도 그때 이후로 줄곧 백수 신세였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파리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고, 밥값은 늘 캐롤라인이 냈다. 동생은 다른 기술이라도 배워야 할지 누나에게 물었지만, 캐롤라인은 도무지 해줄 말이 없었다. 간호사 부족 사태는 심각했지만, 동생은 피를 마주할 배짱이 없었고 그렇다고 몸을 쓰는 현장직 체질도 아니었다. 동생은 쓸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고, 캐롤라인은 동생이 화제를 돌리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AI 반대 공약을 내걸고 커리어를 쌓아온 정치인들은 자신의 선견지명을 요란하게 광고해 댔고, 간을 보며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우왕좌왕했다. 유럽의 수도에서는 거리 시위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누군가는 노동권 보장을, 누군가는 미국산 AI 금지를, 또 누군가는 모든 AI의 전면 금지를 외쳤지만, 결국 그 모든 외침의 끝은 하나였다. 정부 청사 안의 무능한 관료들이 제발 뭐라도 대책을 내놓으라는 절규였다.
유럽 정보기관들은 이미 1년 전부터 유럽 대중을 겨냥한 조직적인 정보 작전의 징후를 포착하고 경고해 왔다. 그 공작의 중심에 있는 선전 선동은 유럽인들이 품고 있는 현지의 불안감을 정확히 겨냥했다. ‘미국의 빅테크가 유럽 대륙을 황폐화하고 있다’, ‘워싱턴은 유럽을 속국 취급한다’, ‘대서양 동맹은 일방적인 착취 관계일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완전히 틀린 말은 없었기에 파급력은 무시무시했다. 네덜란드와 독일 정부는 이 공작의 배후로 베이징을 지목하는 조사 보고서를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미국의 독점에 뼈저린 환멸을 느끼고 있던 대중은, 배후에서 누가 불을 지폈든 그리 개의치 않았다.
크리스티안: 유럽 현지 분위기는 좀 어때?
캐롤라인: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났어. 그럴 만도 하고.
크리스티안: 여기도 난리야
크리스티안: 지난주에는 또 다른 데이터 센터가 화염병 테러를 당했어
캐롤라인: 뉴스 봤어.
크리스티안: 모두가 패배자가 된 기분이야
크리스티안: AI 기업들만 빼고
2030년 6월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로봇 산업의 절대 강자는 단연 중국이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의 아틀라스 역시 이 판에 사활을 걸고 전면전을 선언했다.
아틀라스는 중국에 필적하는 규모의 로봇 생산 기지를 구축하고자, 산업 데이터와 제조 역량 확보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CEO가 내세운 논리는 명확했다. 핵심 지능인 AI 소프트웨어 분야만큼은 여전히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아틀라스는 과거 유럽의 기술을 빼앗아 신설한 ‘월드 모델’ 팀의 활약에 힘입어, 범용 로봇 공학의 앞길을 가로막던 마지막 소프트웨어 장벽을 마침내 넘어섰다. 문제는 물리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만약 아틀라스가 경쟁사들보다 한발 앞서 공급망을 선점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쥐게 될 우위는 복리로 불어날 터였다. AI가 스스로 코드를 짜며 진화하듯, 머지않아 로봇이 로봇을 만드는 공장을 건설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미국에서 새로운 로봇 공장을 짓는 데 2년이 걸리는 반면, 중국은 단 7개월이면 충분했다. 게다가 지난 10년간 데이터 센터를 무섭게 확장해 온 대가로 미국은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국 대중은 AI와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전력망이나 데이터 센터 같은 신규 시설이 들어설 때마다 지역 사회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주(州) 정치인들은 표심을 쫓아 유권자들의 편에 섰다.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부실한 인프라와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악화된 여론이 끊임없이 그 발목을 잡았다.
결국 아틀라스의 CEO는 가장 빠른 돌파구가 건설이 아니라 인수, 즉 기존 공장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호적인 투자 펀드들의 막강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그는 바퀴 달린 로봇과 사족보행 로봇, 휴머노이드를 생산할 수 있는 실제 제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용 부지를 갖춘 제조 기업을 찾아 본격적인 쇼핑에 나섰다.
유럽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최우선 타깃이 되었다. 수년간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에 치여 온 독일 최대의 자동차 기업은 이미 파산 직전이었다. 시가총액은 전기차 붐이 일던 정점 시절과 비교해 80%나 폭락하며 180억 유로까지 주저앉은 상태였다. 기업 가치가 13조 달러에 달하는 아틀라스에게 그 정도는 푼돈에 불과했지만, 이를 통해 거머쥘 실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독일의 엄격한 노동법은 이 기업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 그 탓에 몸집만 비대해진 잉여 인력을 고스란히 떠안은 회사로서는 이미 임금을 감당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고, 주주들 역시 지난 2년 동안 어떻게든 탈출할 구멍만 찾던 터였다. 연간 수천만 대의 로봇을 찍어낼 첨단 제조 기반이 절실했던 아틀라스에게, 이 몰락한 자동차 대기업은 그야말로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독일 정부는 격렬히 반발했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워 매각을 가로막았지만, 내부 사정을 아는 이들은 그것이 실상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틀라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CEO는 즉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은 이미 ‘로봇 산업을 지배하는 자가 경제를 지배한다’라며, 중국의 독주를 워싱턴이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온 터였다. 통화 후 7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백악관은 유럽산 자동차 수입품에 무자비한 폭탄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공식적으로는 이번 독일 자동차사 인수 건과는 전혀 무관한 조치라는 위선적인 명분을 내세웠다.
3주 후, 매각 조율이 완료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다만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포장을 씌웠다. 독일 정부가 신설 법인의 지분 20%를 소유하고, 기존 이사회가 명목상의 경영권을 유지하는 형태였다. 공식 보도자료에는 ‘유럽’이라는 단어가 무려 열한 번이나 강조되어 등장했다.
독일 정부의 눈이 미치지 않는 막후에서, 실권을 쥐고 흔드는 것은 아틀라스였다. 아틀라스는 실질적인 경영 지배권과 제조 플랫폼에 대한 라이선스 권리는 물론, 향후 진행될 모든 자본 조달에 대한 우선매수권까지 독점했다. 모든 수익은 미국 델라웨어주의 지주회사로 흘러 들어갔다. 독일 정부가 건진 것은 고작 체면치레뿐, 실속은 전부 털린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러한 자본 침식의 도미노 현상은 이후 몇 달간 유럽 전역에서 반복되었다. 기업 이사회로서는 주주의 이익을 대변해야 마땅했고, 제시된 매입가가 시장 가치를 훌쩍 웃도는 데다 이를 거절하면 남는 건 파산뿐인 상황에서 주주들이 내릴 결론은 뻔했다. 로봇, 항공우주, 정밀 부품 및 공구 제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내로라하는 첨단 제조업체들이 차례차례 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가며 잔혹한 구조조정의 칼날을 맞았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늘 같았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지키고 핵심 생산 시설을 유럽 땅에 묶어두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이라는 것. 하지만 허울 좋은 변명일 뿐, 현실의 유럽에게는 미 자본의 거대한 약탈적 공세를 막아낼 실질적인 대안이 전혀 없었다.
크리스티안: 열한 번이네
캐롤라인: 나도 세어봤어.
크리스티안: 너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2030년 8월 – 모델 붕괴
미국이 유럽을 무너뜨리려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국의 존망이 걸린 단판 승부라 믿으며 중국과의 레이스에서 이기려 할 뿐이었다. 하지만 캐롤라인이 처한 현실에서 보기에는, 그것이 파멸과 무엇이 다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유럽은 이미 2008년 금융위기 때 이와 유사한 악순환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세수는 곤두박질치는데 복지 지출 부담은 치솟는다. 정부는 오지 않는 경제 성장을 담보로 빚을 내고, 채권자들은 대출 심사의 문턱을 높인다. 이 단계가 반복될수록 정책 입안자들이 쥘 수 있는 카드는 줄어들고, 남은 선택지마저 최악에 가까워진다.
파리에서 프랑스 재무장관이 하원에 예산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장관 본인은 물론, 의회 안의 그 누구도 서류에 찍힌 숫자를 믿지 않았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세 가지 수치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지 지출은 코로나 팬데믹 수준에 육박했고, 법인세 수입은 9%나 급감했으며, 전체 예산의 10%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의 이자를 갚는 데 고스란히 쓰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억지로 짜 맞춘 예산안이 굴러가는 것처럼 포장하려면 현실성 없는 장밋빛 성장률을 가정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런 눈속임은 모두에게 즉각 간파당했다.
점심을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그 뉴스를 지켜보던 캐롤라인은 문득 남동생을 떠올렸다. 동생은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학자금 대출만 잔뜩 짊어진 채 모아둔 돈도 없어 결국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동생의 친구들 역시 대부분 비슷한 처지였고, 그중 몇몇은 영국으로 이주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영국은 다른 EU 국가들에 비해 AI 시대로의 전환에 훨씬 영리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무디스가 프랑스를 신용등급 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고, S&P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공식적인 신용등급 강등은 시간문제였을 뿐, 시장은 이미 악재를 가격에 선반영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채 금리는 독일 국채 금리와의 격차를 무섭게 벌리며, 유로화 도입 이래 역사상 가장 넓은 스프레드로 치솟았다. 시장은 이제 프랑스의 1유로와 독일의 1유로가 같은 가치를 지녔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유로존의 결속 자체가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다.
9월 들어 프랑스의 부채 이자 상환 비용이 전체 예산의 12%를 돌파했다. 그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 신용평가사들은 분기별 정기 심사를 폐지하고 상시 감시 체제로 전환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의 신용등급이 연쇄적으로 폭락했다. 이 네 국가의 국고로 흘러 들어갔어야 할 자금은 미국 기업의 재무제표로 빨려 들어간 뒤였고, 남아 있는 세수 기반은 치솟는 복지 비용과 천문학적인 이자 부담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경제 지표가 발표될 때마다 성장률 전망치는 하향 조정을 거듭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발 자금줄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펀드가 포르투갈의 인프라 은행에 신용 한도를 제공했다. 또 다른 중국계 자본은 유럽의 그 어떤 금융기관도 감히 제안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리스 국채의 일부를 차환해주었다. 여기에 스페인 지방 정부의 채권 인수자로 나선 세 번째 펀드까지 등장했다. 유출된 EU 집행위원회 내부 문건은 이러한 움직임을 ‘전략적 목적을 띤 자본 배치’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지는 안개 속이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나 극자외선 노광장비 라이선스 계약을 노린다고 분석했고, 미·유럽 동맹의 균열이라는 막연한 외교적 성과만을 바란 결과라는 해석도 있었다.
크리스티안: 프랑스 수치 봤어?
캐롤라인: 내가 정말 걱정하는 건 중국이 던져주는 생명줄이야.
캐롤라인: 우리 완전히 찢겨 나가고 있어.
크리스티안: 유감이야
크리스티안: 정말로
정치적 후폭풍은 이내 폭발했다. 유럽 전역에서 시작된 시위는 점차 과격해지며 유혈 사태로 번졌다. 브뤼셀 EU 본부의 모니터에는 파리와 로마에서 벌어지는 폭동 현장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시위대의 주축은 젊은이들이었으며, 이들이 공유하는 유일한 확신은 ‘시스템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절망감뿐이었다. 대다수 EU 국가의 지지율 조사에서는 반AI와 반미 성향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포퓰리즘 정당들이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유럽 연합은 각자도생의 길로 흩어지고 있었다. 남유럽은 북부 재정 건전국들의 원조를 갈망했지만, 독일처럼 부채 위기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국가들마저 저마다의 내부 위기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유럽연합이라는 블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슬로바키아는 무역을 제외한 다른 현안에서 EU 집행위원회의 권고를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를 경계하면서도 더 이상 유럽연합의 안보 우산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폴란드와 발트 3국은 미국과의 밀착을 한층 강화했다. 자체 데이터 센터를 구축해 협상 카드를 쥐고 있던 북유럽 국가들은 브뤼셀을 배제한 채 독자적인 동맹을 결성했다. 영국 내에서는 마침내 브렉시트가 한 가지 이점은 가져다주었다는 뒤늦은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이제 브뤼셀의 간섭 없이 워싱턴과 직접 독자적인 AI 양자 협정을 맺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거센 반AI 여론에 직면한 미국 정부는 유럽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의 일자리 보장 프로그램과 과감한 현금 지급 정책을 쏟아냈다. 미국 내 시위 역시 완전히 잦아들지는 않았지만, 정부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유럽의 대중과 재무장관들은 이 극명한 대조를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특히 미국의 파격적인 재정 지원이 자신들은 도저히 창출할 수 없는, AI 주도 성장에서 비롯된 자금력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2031년 1월에 이르자 유로화는 걷잡을 수 없는 매도 공세에 직면했다. 남유럽에서 빠져나간 자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연이어 시장 개입에 나섰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고, 결국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이 바닥을 드러냈다. 2월 말,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예금주들이 북부의 안전지대로 자금을 빼내는 속도는 ECB의 자금 상쇄 능력을 진작에 추월했다. 사석에서 유로화 체제의 존속을 장담하는 유럽 관료는 이제 단 한 명도 없었다.
크리스티안: 멘탈은 좀 어때? 버틸 만해?
캐롤라인: 괜찮아.
크리스티안: 샌프란시스코로 와
크리스티안: 진심이야. 여기 오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자리 만들어줄 수 있어
캐롤라인: 떠날 수 없어.
크리스티안: 왜 안 되는데?
캐롤라인: 누군가는 여기 남아야 하니까.
2031년 3월 – 양대 거인 사이에서
2031년 초에 이르자 전 세계의 권력은 단 두 곳으로 집중되었다. 미국의 AI 기업들들이 인지적 최전선을 선점했다면, 중국은 여전히 물리적 제조 최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미국의 AI 기업 아틀라스 한 곳의 기업 가치가 유럽의 모든 상장 기업을 합친 것보다 컸다. 미국의 3대 AI 기업이 각각 컴퓨팅 자원에 쏟아붓는 비용은 유럽연합 전체의 국방비보다 많았다. 중국 선두 기업이 한 달 동안 출하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수는 유럽 전역이 1년 동안 출하하는 물량을 가볍게 웃돌았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중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대만은 다시 격랑의 중심에 섰다. 세계 최첨단 반도체 공급을 책임지는 TSMC의 핵심 생산 기지가 대부분 대만 본섬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양국의 인지형 AI 격차가 벌어질수록, 대만이 갖는 전략적 가치 역시 그에 비례해 커져만 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서너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던 양국 해군의 신경전은 이제 매주 일상적으로 되풀이되었다. 두 강대국은 AI 기반의 무기 체계를 세상 앞에 과시하듯 선보이는 한편, 그보다 훨씬 위력적인 비밀 병기들을 물밑에서 은밀히 시험 가동했다. 워싱턴에서는 민간 연구소와 국방부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밀착했고, 베이징에서는 보다 공식적으로 민군 통합이 이루어졌다. 시사 평론가와 분석가들은 이제 ‘무역’이나 ‘냉전’ 같은 수식어 없이, 그저 ‘전쟁’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입에 올렸다. 전면전을 촉발할 수 있는 권한은 양국 수도에서 각각 서너 명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공식 석상에서 솔직하게 인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유럽은 이미 재앙적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양극화는 극심해졌고 사회 모델은 무너지고 있었다. AI 쇼크의 타격이 가장 심한 국가들은 경제 성장이 멈춰 섰고, 그나마 사정이 나은 국가들조차 경제 지표가 국민의 삶의 질과 완전히 무관하게 흘러갔다.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높은 회원국들에서는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이 폭등했다. 유럽의 국채는 대형 손수레에 현금을 가득 싣고 다녀야 하는 초인플레이션 국가에서나 볼 법한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과연 미국과의 부의 격차가 단순히 노동 시간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유럽의 전반적인 삶의 질이 더 나은지 치열하게 논쟁하던 경제학자들도 이제는 이제는 침묵을 택했다. 캘리포니아 땅을 밟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항에 내린 지 단 몇 분 만에 그 격차를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에게는 아직 마지막 패가 하나 남아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프론티어 AI 산업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전 세계의 AI 패권 경쟁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유일한 전략적 병목을 여전히 쥐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최첨단 반도체를 찍어내는 데 필수적인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오직 ASML뿐이었다. ASML의 장비 없이는 미국도 AI 분야의 독주 체제를 계속 이어갈 수 없었고, 반대로 중국이 이 장비에 접근할 수만 있었다면 미국을 이미 따라잡았을터였다.
중국은 자체적인 DUVi 노광장비 개발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1년 뒤 양산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너무 적었고, 너무 늦었다. 기술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금의 1년은 한 세대와도 맞먹는 시간이었으며, DUVi 수준의 장비로는 중국이 그토록 갈망하는 최첨단 칩을 찍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주는 매일같이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초지능 AI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생각에 깊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초지능 AI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지도부의 핵심 고문들은 미국이 고도로 진화한 AI를 앞세워 중국의 핵 반격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이들은 AI의 정교한 여론 조작과 선동 능력이 공산당 체제의 근간을 흔들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비록 로봇 공학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그 사실이 이러한 공포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베이징은 지난 2년간 추진해 온 전략의 수위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남유럽으로 흘러 들어가는 차관의 물량은 비대해졌고, 조건은 더욱 관대해졌다. 막후에서 벌어지는 정보전도 맹렬해졌다. 유럽 지도자들의 눈앞에는 중국과의 밀월 관계가 가져다줄 달콤한 미래가 아른거렸다. 특혜성 시장 개방, 로봇 공동 생산, 그리고 워싱턴이 자신들을 철저히 배제했던 세계 무대의 상석이 보장되는 미래였다. 처음으로 ASML과 그 EUV 기술이 노골적으로 거론됐다. 지난 5년간 미국의 속국처럼 취급당하며 쌓인 앙금은 깊었고, 유럽의 몇몇 국가 정부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중국이라는 대안이 수면 위로 올라와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유럽을 미국으로부터 분리해 독자적인 궤도로 끌어들이려 했고, 워싱턴의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펜타곤은 ASML의 통제권을 상실하는 것을 핵무기 확산에 준하는 국가 안보의 치명적인 위협으로 규정했다. 백악관은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바로 지금, ASML을 직접 통제권 아래 두어야 한다고 결단했다. 결정권을 가진 핵심 3개국 정상에게 직통 전화가 걸려 왔다. ASML 본사가 위치한 네덜란드, 그리고 이들의 묵인 없이는 네덜란드 정부조차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유럽의 양대 축, 독일과 프랑스였다.
미국 부통령이 보안 회선을 통해 40분간 쏟아낸 제안의 골자는 이러했다. ASML을 미국과 네덜란드의 합작 지주회사 형태로 재편하고, 생산량과 고객사 관리, 기술 이전에 대한 지배적 의결권을 워싱턴이 통째로 쥐겠다는 구상이었다. 그 대가로 미국이 내민 카드는 미국 영토 내에 대규모 신규 생산 기지를 건설할, 유럽으로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규모의 자본 투입이었다. 더 파격적인 제안도 있었다. 미국의 AI 초과 이익과 연동하여 유럽 시민들에게 현금을 직접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시작은 연간 1인당 100유로 안팎의 소액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액수는 불어날 터였다.
유럽의 세 지도자는 백악관의 은밀한 제안을 다른 EU 회원국 정상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애초에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기도 했거니와, 다른 국가들이 돈에 눈이 멀어 제안을 수용하라고 압박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이 정중히 거절의 뜻을 밝히자, 백악관은 기다렸다는 듯 제안 내용을 대중에 전격 공개하며 당근 옆에 채찍을 꺼내 들었다. 유럽연합이 끝내 서명하지 않는다면 유럽 전역을 ‘첨단 추론 서비스 규제(Frontier Inference Services Rule)’에 따라 3등급 지역으로 강등하고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미국산 AI 기술 접근권을 박탈하겠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워싱턴은 판의 모든 패를 자신들이 쥐고 있음을 확신했다. 이미 대만 파트너들을 통해 충분한 수의 EUV 장비를 선점하고 유지보수 노하우까지 축적해 둔 상태였다. 유럽이 프론티어 AI 없이 버티는 것보다 미국이 ASML 없이 버틸 수 있는 시일이 훨씬 길다는 점을 워싱턴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유럽 각국은 워싱턴의 압박을 밀어낼 명분을 찾기 위해 베이징의 의중을 다급히 타진했다. 외교적 돌파구를 찾으려는 절박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전혀 달랐다. 베이징 역시 유화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사태를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 뒤였다. 네덜란드가 워싱턴과 손을 잡는 순간 희토류 수출 조건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경고가 날아들었다. 로봇 수출 라이선스 역시 재심사 대상에 올랐다. 게다가 베이징이 통보한 마감 시한은 미국의 시한보다 훨씬 짧았다.
이제 유럽 앞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그리고 모든 길은 파국을 향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워싱턴의 제안을 수용한다면, 유럽 대륙은 마지막 남은 협상력을 잃고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국이 경고를 실행에 옮겨 공급망을 차단하는 순간, 숨통만 붙어 있던 유럽의 제조업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숨을 거둘 것이었다.
베이징과의 공조를 선택해 남유럽의 침몰을 막고 당장 눈앞에 닥친 연합의 재정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는 시나리오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인류의 미래를 쥐락펴락할 열쇠를 중국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꼴이었다. 그 대가로 들이닥칠 워싱턴의 보복은 중국의 지원을 전제로 하더라도 유럽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3등급 강등은 그저 서막에 불과할 터였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유럽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 양대 강국의 분노를 동시에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최첨단 추론 기술과 핵심 제조업 원자재를 동시에 잃을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균열이 가고 있는 유럽연합을 결국 와해로 이끌 파멸적인 시나리오였다.
유럽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14시간이 지났지만 진척은 거의 없었다. 이사회는 결국 워싱턴으로 대표단을 보내기로 승인했다. 회의실 안의 모두가 짐작하듯, 대표단에게 부여된 권한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통상적인 이사회 관례와 달리, 이번에는 각국 정상들이 현장에서 직접 결단을 내릴 예정이었다.
화요일 오전, 아이젠하워 행정동 건물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유럽 대표단은 네덜란드 총리, 프랑스 대통령, 독일 총리, 폴란드 총리, 스페인 총리, 이탈리아 장관회의 의장이 이끌었으며, 각국 외교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이 동행했다.
미국 측 역시 비슷한 규모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여기에 뒷줄에는 소개도 받지 않은 채 인이어를 착용한 관료 두 명이 더 앉아 있었다.
귀에 꽂힌 인이어는 접근 가능한 유럽의 모든 통신망에 침투한 최첨단 AI 모델과 연결되어 있었다. AI는 지난 화요일 각국 정상들이 내각 회의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고, 누가 전립선암 치료를 받고 있으며, 누구의 딸이 법적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정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약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파멸을 피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내놓을지까지 전부 꿰뚫고 있었다. 유럽은 아무것도 모른 채 판에 뛰어들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집행위원회가 워싱턴에 대동한 지원팀의 일원으로 와 있었다. 그녀는 대표단 대기실에서 두 칸 떨어진 방에 앉아, 벽면 스크린을 통해 송출되는 폐쇄회로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전이 끝날 무렵이 되자 정상들의 의견이 완전히 갈라졌음이 명백해졌다. 독일 총리와 폴란드 총리는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자며 강력히 밀어붙였다. 스페인 총리는 중국과의 공조를 원했고, 프랑스 대통령은 양측 모두를 거부하자고 맞섰다. 네덜란드 총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안색이 잿빛이었고, 이탈리아 장관회의 의장은 3시간 동안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정오를 기해 휴회가 선언되었다. 정상들은 각자 대표단을 이끌고 주변 소회의실로 흩어졌다. 캐롤라인은 커피도 마시고 머리도 식힐 겸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선 그녀는 회의실에서 홀로 걸어 나오던 이탈리아 장관회의 의장과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재킷을 벗어 손에 든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내린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왜소한 체구였다. 의장은 캐롤라인의 출입증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집행위원회 소속인가요?”
“통상총국 소속입니다, 의장님.”
그는 잠시 캐롤라인을 응시하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함께 좀 걸읍시다.”
두 사람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의장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 말단 직원이나 기자, 심지어 자신의 운전기사에게까지 불쑥 의견을 묻는 돌출 행동으로 유명했다. 누군가는 이를 인간적인 매력이라 불렀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는 그런 방식으로 유럽 정계에서 40년간 살아남은 노련한 정객이었다.
“회의실 안에 있는 이들은…” 의장이 입을 열었다. “저마다 지난 2년 동안 해왔던 해묵은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들이지.” 그가 고개를 돌려 캐롤라인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세 가지 선택지 중에, 무엇이 가장 우려스럽습니까?”
캐롤라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마치 우리의 옵션을 열어두는 신중함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그저 상황에 휘말리며 환경의 희생양인 척 방관하기보다는, 주도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그토록 막강한 레버리지를 쥐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미국을 택해야 합니다.”
의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을 뿐,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카를 달래는 삼촌처럼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고마워요. 가서 커피라도 한 잔하고 와요.” 그는 몸을 돌려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캐롤라인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찬물로 세수를 한 뒤 거울 속 자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면대 가장자리를 움켜쥔 채 떨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높고 좁은 창틀 너머로, 워싱턴의 하늘이 날카로운 조각처럼 잘려 나가 있었다.
복도 끝 방에서는 여섯 명의 유럽 지도자가 유럽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었다. 그 거대한 저울 위에 자신이 던진 한마디가 조금의 파장이라도 일으켰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날 저녁, 캐롤라인은 홀로 호텔을 향해 걸었다. 3월의 워싱턴 공기는 쌀쌀했다. 문득 남동생의 얼굴이 스쳤다. 그리고 6년 전, 헤이즈 밸리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세상이 곧 뒤바뀔 것이라며 차분한 확신에 차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크리스티안: 괜찮아?
캐롤라인: 정말 끔찍하게 힘든 하루였어.
크리스티안: 비행기가 지연됐네
크리스티안: 한 시간 뒤에 한잔할까?
캐롤라인: 좋아.